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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용오
작성일 2012-11-12 (월)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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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 거창신씨 이야기

교보생명창설 신용호,신극범,신달자

김진우의 족보이야기-(49)거창신씨(居昌慎氏)

2010년 06월 20일 (일) 13:32:22 김진우 sewoora@naver.com



   



                                                    뿌리공원에 조성된 거창신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작품명)     일 출

              ·조각가     신 학 범

              ·작품설명  바다에서 해가뜨고 있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거창 신씨 가문이 영원히 번창함을 상징함

 



 


                                                     뿌리공원에 조성된 거창신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 조형물에 새겨진 거창신씨 유래>

 

거창신씨의 시조는 신수(慎修)이시다.

공은 중국 송나라에서 1068년 고려에 사신의 일원으로 오셨다가 문종의 권유로 귀화하여 고려인이 되시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은 학식이 매우 높고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관직이 수사도(正一品)에 이른후 졸하시니

국왕이 시호를 공헌(恭獻)으로 내리시어 이후 거창 신씨는 모두 공헌공의 자손이라 이르게 되었다.



2세 안지(安之)祖께서 병부상서가 되시면서 가문은 고려의 귀족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그후 7세 집평(執平)祖께서 신호위대장군, 동북면 병마사가 되시어 몽고군의 침략에 항전하다 전사하셨는데 얼마후 조정이 친원파에 의해 장악되자 신(慎)문은 반원파로 지목되니 8세 성(成)祖께서 거창으로 낙향하시어 본관을 거창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가문은 시조부터 독자로 이어오다가 13세 이충(以衷)祖께서 참판공 기(幾) 서령공 언(言), 양간공 전(詮) 세 아드님을 두시어

그 삼형제분이 파조(派祖)가 되시고 이후 자손이 번창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후 많은 선조께서 등과(登科)하여 신(慎)문은 다시 명문사족의 가문으로 크게 융성하였는데 15세 승선(承善)祖께서

세종대왕의 손녀사위가 되시었을 뿐 아니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따님은 연산군비에 오르시고 아드님 수근(守勤)은 좌의정이

되시었으며 훗날 손녀가 중종비(단경왕후)에 오르시면서 유명한 치마바위 전설을 남기시기도 하였다.

선조를 모신 서원과 사당은 유림에 널리 알려진 거창의 구연서원. 영암의 송양사외도 다수가 있고

이곳 대전의 갈마공원에는 23세 유천(惟天)公에게 숙종대왕이 내리신 효자정려가 있는 바 이는 선조님들이 조정의 중신으로 나라에 봉사하였을 뿐 아니라 충효사상을 드높이고 학문에도 전념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어 후손들을 숙연하게 하고 있다.

                                                                                                                  32世  鏞仁   謹撰

                                                                                                                  31世  覺範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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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작가의 해설>



                                 거창신씨(居昌慎氏) 현대인물



신극범-거창신씨11대(代)대종회장.대전고졸업.연세대학교영문과졸업.대전대총장.민주평통대전부의장.

           국민훈장무궁화장.현재순천향대석좌교수.

신수범(2006년대종회회장).신승남(전검찰총장).신호범(미국워싱턴주상원의원).

신용한(대종회고문,한국기독교실업인회회장).신성애(심청가완창).신정숙.신용규.신용우.신성규.신상만.

신용칠(대종회 카페지기).신달자(시인).신효범(가수).신중우(하늘농원대표).신중태.신용표.신규일.신도범.신용오.신유범.

신도성(慎道晟,1918~1999.9.6일.정치인.정치학자.제3대국회의원.경남지사.제4공화국국토통일원장관.

        대전거주.평화민주당고문).

신순범(전국회의원).신중하(전국회의원).신용남(전국회의원).신경훈(변호사).신익성(서울대교수).

신규성(교수).신윤재(경제기획원근무).신종욱(교수).신영범(교수).신기범(초교교장).신인범(초교교장).

신업재(의사).신태범(병원원장).신용찬(의사).신용희(대한교육보험회장).신용인.신각범.

신용호(1917~2003.9.17일, 교보생명창설자, 신용호 세계보험학술대상-IIS가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의 공적을 기리고자

           지난 1997년에 제정해 매년 보험산업연구에 이바지한 보험학자에게 수여하는 상).

신중열(의사).신용일(철학박사).신학재(교수).신세범(변호사).신만성(검사).신두범(법학박사).신섭중(교수).

신윤성(중등학교교장).신용석(철학박사).신중일(중등학교교장).신일권(초교교장).신채범(의사).신용진(미버지니아대교수).

신중옥(수필가).신중경(화가).신용석(언론인).신춘범(조각가).신홍성(의학박사).신무성(대한건축협회회장지냄) 등등





 


                                                              경회루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치마바위

 

서울인왕산 병풍바위 밑에 우뚝한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다.  

 

              이 바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지금으로부터 4백여년전 조선 중종반정(中宗反正: 서기 1506년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때 당시 국구인 신수근이 이에 몰리어 죽자,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중종에게 죄인의 딸을 대궐 안에 둘 수 없다며, 종묘 사직을 위해 왕비의 폐위를 수차 요청하였다.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왕비 신씨를 폐하여 자기 집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10여 년이나 화락하게 지내던 그 지극한 정분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중종은 가끔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의 신씨 집을 바라보곤 하였다.

한편 폐비 신씨는 폐비는 되었지만 중종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상감께서 늘 경회루에 올라 자기 집을 바라본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신씨는 지난날 대궐 안에서 입던 자신의 치마를 경회루에서 바라볼 때 눈에 잘 뜨이도록 인왕산 높은 바위 위에다 아침에는 내다 걸고 저녁에는 거둬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뒷날 사람들이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다.



중종 반정 때 중종의 비인 신씨가 공신들의 요청에 의하여 폐비가 되었다는 기록은 [연려실기술] 중종조 고사본말 조(條)에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野史叢書)이다.

총 59권 42책으로 된 이책은  저자가 부친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타계(他界)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걸쳐 완성하였다.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분류하고 원문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내용은 태조 이래 현종까지의 283년간(1392∼1674) 각 왕대의 주요한 사건을 사의(私意)를 가하지 않고,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혀서 기록하였고  각 왕대의 기사 끝에는 그 왕대의 상신(相臣:정승).문신(文臣) ·명신(名臣)의 전기(傳記)를 덧붙였다.

속집은 숙종조 47년간(1674∼1720)의 일들을  적었으며 조선시대의 역대관직을 비롯하여 각종 전례(典禮).문예(文藝).천문.지리.변위(邊圍).역대 고전 등 항목별로 그 연혁을 수록하고 역시 인용한 책 이름을 부기하였다.(1911년간)

                                                                                       -출처 <백과사전>.<한국인의 역사>



                                         신씨(慎氏)



우리나라의 신씨(慎氏)는 지난 2000년 조사에서 서산신씨는(553명), 진주신씨(541명),청송신씨(1명), 황산신씨는 (737명) 등 총 5본관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나머지는 거창신씨(居昌慎氏)의 세거지명이라고 한다.

인구는 지난 2000년 조사에서는 총 45,764명으로 나타났다.



                                              거창신씨(居昌慎氏)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거창군(居昌君) 신승선

                                            단경왕후,신수근,신수겸,

                    신도성,교보생명 창설 신용호, 신극범, 신달자, 신승남



본관소재지인 거창(居昌)은 경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대에는 거열군이었으며 신라 경덕왕이 거창으로 고쳤고 조선 태종때 거제현과 합하여 제창현이 되었다.

이후 여러차례의 변화를 거쳐 1895년에 거창군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신씨(慎氏)는 중국 천수에서 계출된 성씨로 알려졌으며 서기1068년 개봉부 출신인 신수(慎修:시호는 공헌)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고려 문종의 권유로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신수(慎修)는 학식이 높고 특히 의술에 정통하였다고 한다.

신수(慎修)는 고려 때 좌복야(左僕射;상서도성 소속의 정2품 벼슬로 상서령 다음 관직)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고려때 중서문하성의 종2품벼슬).수사공(守司空:고려때 3공의 하나로 정1품 벼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신안지(慎安之)도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 벼슬로 국방부장관)를 지내 신씨 가문은 고려의 귀족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신수(慎修)가 죽자 왕이 시호를 공헌(恭獻)으로 내렸으며 거창 신씨는 모두 공헌공의 자손이다.

시조의 6세손 신집평(慎執平)이 서해의 섬 죽도에서 몽고군과의 전투 중 순절했고, 신집평의 외아들 신성(慎成)은 아버지가 죽자

개경을 떠나 남쪽인 거창으로 내려가 살며서 거창신씨의 시원을 이루었다.



 


                                                                   거창신씨 10조(祖)위(位) 제단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초에 판이주현사를 지낸 신이충(慎以衷)이 숭록대부(崇祿大夫:종1품의품계)로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의정부 종1품벼슬)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거창신씨의 백파(제1파), 중파(제2파), 계파(제3파)의 파조(派祖)가 되어 신씨가문을 중흥시켰다.

신이충의 아들 중 장남 신기(慎畿)는 충청도사(都事:종5품 벼슬)와 이조정랑(正郞:정5품벼슬.이조정랑은 전랑이라했는데 그 권한이 대단하여 정승도 관여하지 못했다 함), 성주목사(牧使:정3품 외직 문관 벼슬)를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종2품 벼슬.감사)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의 품계)로 호조참판(參判:종2품벼슬) 겸 보문각제학(寶文閣 提學:보문각은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아이며 제학은 종2품 벼슬,규장각 제학은 종1품이나 종2품)에 추증되었고,



차남 신언(慎言)은 서령을 지냈다.



셋째 아들 신전(慎詮)은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정3품벼슬),호조참의(參議:정3품벼슬),황해도 관찰사(觀察使:종2품벼슬) 등을 지내고 순충보조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정1품 벼슬.정승)에 추증되고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에 추봉되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거창신씨 13세 양렬공 신이충 배 순창설씨 제향소

 

거창신씨는 시조부터 독자로 이어오다가 신이충(慎以衷)이 참판공 기(幾) 서령공 언(言), 양간공 전(詮) 세 아들을 두어 그  삼형제가 파조(派祖)가 되고 이후 자손이 번창하였다.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생림 소재>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딸과 혼인한 신승선(慎承善)은  거창신씨를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익대삼등공신으로 거창군(居昌君)에 봉해졌으며  성종 때 좌리삼등공신에 올라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돈령의 친밀을 도모하기 위한 사무처리 관청의 종2품 벼슬)와 공조판서(工曹判書:산택.공장.영조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아의 정2품 벼슬.장관)를 지내고 성절사(聖節使:명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자신의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에 책봉되면서 예조판서(判書;정2품 벼슬.장관),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벼슬로 장관)를 지내고, 우의정(右議政:정1품 벼슬로 정승). 좌의정(左議政:정1품 벼슬로 정승)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다.



사위인 연산군의 폭정을 개탄하고 병을 핑계로 여러번 관직을 사퇴하였고 정무는 동료 재상들에게 일임하는 등 소극적인 자세로 정승의 자리에 임하여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능하다고 희롱하였다고 한다.

영의정(領議政:정1품 벼슬.정승) 신승선의 아들 신수근(慎守勤), 신수겸(慎守謙), 신수영(慎守英) 3형제는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중종반정 주역들의 보복으로 모두 피살되는 불운을 맞았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기도 했던 신수근은 우의정(右議政:정1품벼슬.정승)을 거쳐, 서기1506년(연산군 12)에 좌의정(左議政:정1품 벼슬.정승)에 이르렀으며 그의 사위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아 죽음을 당했다.

신수근의 막내 신수영(慎守英)도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벼슬.법무부장관)에 이르러 중종반정에 화를 입었고 또다른 아우 신수겸(慎守謙)은 당시 개성유수(開城留守:종2품 벼슬)로 있을 때 박원종이 심복을 보내 거사할 것을 권유했으나 "우리 형제의 마음이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이니, 내형에게 물어보라" 하였다가, 중종반정 후에 박원종이 보낸 부하 역사(力士)에게 살해되었으며, 형조판서 신수영도 역시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신수근의 딸은 진성대군이 중종이 된 후 왕비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정 7일 만에 폐위되었다.



그 뒤 서기1739년(영조15) 유생들의 상소로 왕비에 복위 단경왕후(端敬王后)에 봉해지고  묘도 능으로 봉함으로써 200 여년만에 한을 풀게 되었다.

예조참의(參議:정3품 벼슬) 신후갑(慎後甲)의 아들 신자건(慎自健)은 강원도관찰사(觀察使:종2품벼슬.감사)를 지내고 교하로 낙향 서예에 전심하여 필명을 떨쳤으며 그는 왕희지의 필법을 연구하였고 창덕궁의 <요금문>3자를 썼다고 한다.



 


                               효자 거창신씨 정려(孝子居昌慎氏旌閭)-대전광역시 서구 갈마공원내

                                              대전광역시 서구 갈마동 갈마공원내(국민생활관 뒤편)에 있다.



효자 신유천(慎惟天:1620~1695)은 거창이 본관으로 호는 삼성당(三省堂)이다.

서기 1620년 공주군 천내면 향정리(둔산동.월평동.갈마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신유천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와 이웃을 돕는 마음이 깊었다.

3살때 어머니를 잃고 나이 16살이 되어도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어머니 제사가 있는 그 달은 한달간 술과 고기를 금하고 평생을 근신하여 잔치에도 참석치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를 항상 기쁘게 하였고, 아버지가 병환으로 오래 누워있을 때 모든 음식과 약을 직접 챙겼다.

또한 구운 매추라기를 즐겨하는 아버지를 위해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고, 마침내 돌아가시자 삼년상 동안에도 날마다

매추라기를 잡아 상에 올렸다.

부모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선조들과 외가의 묘를 정성껏 관리하고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전답을 마련하였다.

또 계모(繼母) 봉양에도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하였으며, 친척 형들도 친형과 같이 대하니 주위에서 칭송이 잦았다.

1695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신유천의 효성을 기려 1697년 <효자정려>를 내렸다.

원래의 위치는 서남쪽으로 약 1km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둔산지구 공영개발로 1992년에 현 자리로 옮겨 복원되었다.

정려각은 전면 측면 각 1칸 규모에 팔작지붕으로 앞에 <효자문>이란 현판을 달았다.

서기 1818년에 신수혁이 쓴 신 효자정려기(慎孝子旌閭記)와 정축(丁丑)년에 내려진 효자 삼성당 거창신공 유천 지려

(孝子 三省堂 居昌慎公 惟天 之閭) 란 정려문이 걸려있다.  



               


 


                 

                      제주 입향조 신명려(慎明麗)는 거창신씨의 시조  신수의 18세손으로 서기 1628년(인조 6)에

                      정묘호란의 혼란을 피해 제주목 화북포에 입도 낙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은 거창신씨 제주 신촌리 동족촌)-출처 제주선현지

 

신우장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 신천익(慎天翊)과 신해익(慎海翊)은 쌍둥이 형제로 유명했는데  그의 어머니 이씨(李氏)의 태몽에 학 한쌍이 날아와 팔에 안겼다가  '한 마리는 하늘로 올라가고 한 마리는 바다로 날아갔다'고 하여 쌍둥이의 이름을 신천익(慎天翊)과 신해익(慎海翊)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들 형제 중 신천익은 효종 때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벼슬)과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관청인 사간원의 으뜸 벼슬로 정3품),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벼슬.차관)을 지냈으며 문장과 시부(詩賦)에 능했고,한성부윤(府尹:종2품벼슬)으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그만 둠)했으며,

신해익은 광해군 때 알성시(謁聖試:왕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알성하고 나서 보던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후 예조좌랑(禮曹佐郞:정6품 벼슬)에 올라 <상보민편>을 편찬하였으며 학행이 뛰어났던 후손 신무(慎懋)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중종반정 이후 거창신씨는 한동안 쇠침했으나 조선 중기에는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명종 때는 신희복(慎希復)이 홍문관직제학(弘文館 直提學: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던 관청인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벼슬).관찰사(觀察使:조선때 각 도의 종2품 벼슬로 감사) .개성부유수(留守:조선시대는 지방관인 유수를 개성.강화.경기도 광주.수원 등에 설치하였는데 품계는 정2품 또는 종2품으로 정원은 각 2명씩 두었음)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의정부 정2품벼슬)에 올랐으며  대학자로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영조 때의 세자시강원시직(世子侍講院侍直: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 신이의(慎爾儀), 영조 때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3품 당상관 벼슬) 신수이(慎守彛), 영조때 실학자로 서학변(西學辨)을 지은 신후담(慎後聃) 등이 가통을 이었다.



이 밖에도 명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 벼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벼슬)를 역임한 신거관(慎居寬), 선조 때 시와 글씨로 이름났던 신희남(慎喜男)이 가문을 빛냈다.



거창신씨는 조선시대에 왕비 2명, 상신(相臣: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말함.정승) 2명, 공신 2명을 배출했으며

문과(文科:문관을 뽑던 과거.대과)에 34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초시.복시.전시 3단계였음)에 9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기 위한 과거)에 93명,역과에 11명 등 모두 14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거창신씨는 감사공파, 참의공파, 동추공파, 통례공파, 곽산공파, 거헌공파, 현령공파, 참판공파, 대헌공파,장성공파가 있다.

 





 


                                            거창 황산리 거창신씨 고가촌 돌담(신도성 전 장관 생가)

 

                                                                  신씨 고가촌 돌담의 지혜



수승대 초입의 맞은편 길로 들어가면 황산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거창 신씨의 집성촌이다.

한복판을 흘러내리는 개울이 마을을 둘로 나누고 있는데, 서쪽을 '큰땀' 건너편을 '동녘'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큰땀에는 양반네들이 주로 살고 동녘에는 소작인이나 노비들이 살림을 꾸렸기 때문에

지금 기와집이 모여 있는 곳이 큰땀이다.

황산 신씨 고가마을은 18세기 중엽에 형성되었으며 지금의 마을 내 고가(古家)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신씨(慎氏)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고가도 유명하지만 이곳이 인기 있는 이유는 마을 담장 때문이다. 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부는 진흙을 섞지 않고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다.

그 위에 하부보다 작은 자연석과 진흙을 섞어 쌓았다.

하부에 진흙을 섞지 않은 이유는 담장 안의 빗물을 담장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기 위한 지혜였다고 한다.

황산 신씨 고가 마을의 담은 활처럼 휜 담장상부에 기와를 이어 쌓아 전통 담장 길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자료참고>  

실용이 변화시킨 고택은 신도성 장관 생가 황산 신씨 고가 중 둘러볼 만한 곳은 17호라는 고가번호가 매겨진 신위범의 고가다.

현대식과 전통식을 버무렸지만 그 기풍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고택이다.

원학고가(猿鶴古家)라는 편액을 단 고택으로 전 국토통일부장관과 국회의원, 경남지사를 지낸 신도성 씨(대전 거주 1999년 작고)의 생가이기도 하다.

고택에 들어서면 집안 주인의 경제력이 집안 곳곳에 묻어난다. 사랑채를 살펴보면 팔작지붕, 궁궐에서사용하는 커다란 돌받침대와 둥근 기둥을 사용했다.  누마루도 각기 다른 구름모양의 장식을 더해 화려하다.  그 밖의 안채와  부속건물도 마찬가지다.

특히 모서리마다 기와를 덧대지 않고 면마다 '해(海)'를 써놓았는데 이는 창건주가'이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바다처럼 넓은 뜻을 가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전한다.

고택의 기풍은 간직하면서도 이 집만의 매력은 실용성이다. 1927년에 지어진 고택답게 현대적 실용성을 최대한 가미했다.  

우선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손님에게 안채까지 길을 비켜준다. 대체로 사랑채까지가 손님의 공간인 전통고택의 형태와 다르다.

안채에도 누마루가 있는데 누마루를 오르는계단을 만든 것도 실용의 결과물이다. 특히 집안에 들어선 뒷간(화장실)은 놀랄만한 것이기도 하다.





 


 

                                                                             황산고가마을 돌담





 


                                              참여정부때인 2006년 6.19일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29호 지정

 

거창신씨는 인구조사에서 1985년에는 총 9,617가구에 인구는 40,015명이었으며 지난 2000년에는 총13,623가구에 인구는 43,890명으로 조사되었다.



거창은 경상남도 북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현재 위천면(渭川面)지역을 임례(稔禮) 혹은 남내(南內)라 하였다.

본래 거타(居陀).거열(居烈)이라 불리우던 것을  757년(신라 경덕왕 16) 가소를 함음현(咸陰縣)으로 남내를 여선현(餘善縣)으로 개편하여 거창군으로 통합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 합주(陜州:합천)에 통합되었다가 1414년(태종 14)에 거제현(巨濟縣)과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 되었다.

서기 1496년(연산군 2)에 거창군으로 승격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

1658년(효종 9)에 안음(安陰:안의)에 편입시키고 1739년(영조15)에 거창부(居昌府)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거창군이 되었고 1937년 거창면이 거창읍으로 승격되었다.









출처 ;  디트news24  칼럼ㅡ김진우의 족보이야기    글쓴이 :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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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金鎭宇)

   -금석문(金石文)에 관심많아 각종 비문(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전국의 문화유적 탐방 지방사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원

   *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한국성씨연구소 대표(현)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 (286개 성씨를 교과서에 없는 역사책으로  수록한 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 펴냄).

    공주고.고려대 경영학.한국과학기술원 수료.

    (삼성의료원과 함께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 선정" 한국성씨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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